The Zhouqian Art Community - How will we live together?, 2024
Towards a Pedagogy of Autonormativity, Kassel 2022
Interview with Curator Zhang Ting, Hangzhou, 2020
Spooky Action at a Distance, Seoul 2018
Modalities of Becoming: On Temporality and Form, Seoul 2018
Circularity Conditions (There might have been light), Berlin 2015
Zirkularitätsbedingungen (Es hätte Licht geben können), Berlin 2015
되기의-양식시간성-및-형식에-seoul-2018
<MMCA 레지던시 세미나 09. 마이클 저스트>
- 일시: 2018년 8월 30일 오후 2시
- 장소: MMCA 서울관 디지털정보실 라운지 DAL
○ 사회 | 박희정
안녕하세요. 레지던시 세미나에 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세미나 진행을 맡은 저는 창동레지던시 매니저 박희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진행순서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지난 7월부터 창동레지던시에 입주하고 있는 마이클 저스트 씨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발표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김남시 교수님과의 대담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후 4시부터는 카로 악포키에르 작가의 발표가 있으니 끝까지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발표해주실 마이클 저스트 작가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며, 오늘 세미나에서는 시간성과 형태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해주실 예정입니다. 그럼 마이클 저스트 씨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장내 박수)
발 표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우선 오늘 오후에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돼서 무척 기쁘다는 말씀드리고 싶고요. 이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주신 국립현대미술관에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고, 그리고 창동의 팀 여러분, 특히 박희정 선생님, 신리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한국에 올 수 있게 일부 지원해주신 괴테 인스티튜트, 독일문화원에도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고요. 오늘 토론자로 나오신 김남시 교수님, 그리고 통역사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제 프레젠테이션의 제목이 ‘변화의 양상: 시간성과 형태에 관하여’라는 제목이라서 그것이 어떤 추상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 발표를 통해서 이것이 사실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또 이러한 내용이 제 작업 안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같이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제가 어떤 특정한 매체에 집중해서 작업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다 기능적인 작업을 주로 스튜디오 안에서 진행을 하는 작가이지만 물론 장소 특정적인 설치 작업들도 하고, 또 과정이 중심이 되는 작업들도 진행을 합니다. 그래서 스튜디오에서의 작업 실천과 문화라든지 공간적인 맥락에 더 많이 제한을 받게 되는 프로젝트 중심의 작업들 사이에서 작업을 진행한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이 발표를 지금 보시는 작업에서부터 시작을 하고 싶은데요. 저의 작업 규칙에 예외가 되는 18년 전에 만든 드로잉 일종의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보여드리는 게 제 작업의 개념적 기반을 설명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아서 작업을 보여드리게 됐는데요. 제목을 보시면 「무제(규칙이 깨진 사각형)」이라는 작업입니다. 다음 두 슬라이드는 조금 과학에 연계된 내용을 보여드리겠는데요. 어쨌든 이 작업이 저의 나머지 작업들과 어떤 식으로 개념적으로 연결이 되는지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보시는 게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복잡하게 다 설명을 드리지는 않아도 될 것 같고, 첫 번째 부분에 보면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물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으로 전개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설명이 되는 밑에서 두 번째 줄을 보면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것이 되돌릴 수 있는 과정과 되돌릴 수 없는 과정에 대한 개념을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인데요. 이것이 연결이 되는 것이 어떠한 형태가 시간성을 띠고 시간을 통해서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는지, 이를테면 사회 안에서도 사회 구성물 같은 것들이 어떻게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래서 방금 말씀드린 열역학 제2법칙이랑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이 지금 슬라이드에 보시는 개념인데요. ‘시간의 화살’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특정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이 슬라이드를 보시면 140억 년 전에 어떤 순간에 빅뱅이 있었고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고 그 시간에는 언젠가는 끝이 있을 거라는 결정론적인 관점입니다. 물론 제가 이 개념을 작업 안에서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참조하는 것은 아니고요.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이 있다는 그런 개념으로서 작업에 참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작업 같은 경우에 2015년에 진행을 한 작업이고, 제목을 보면 「무제/無題(일어났던 일)」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요. 금속을 레이저커팅으로 만든 작업이고, 전체 제목이기도 했는데 ‘What’s Done Cannot Be Undone’이라는 ‘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라는 그런 문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에 나오는 레이디 맥베스 같은 경우에 스스로 내린 결정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된 비극적인 캐릭터인데요. 「맥베스」라는 작품에 주로 흐르는 전조가 사실은 죽음이라는 것을 아무리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전조가 흐르고 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작업입니다.
지금부터 보여드리는 것은 시간 순으로 주로 구성해서 보여드리는 작업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시는 작업 같은 경우에 제가 2011년에 휘트니미술관의 인디펜던트 스터디 프로그램의 졸업전시에서 보여줬던 작업인데요. 과정 중심의 참여적인 작업이라서 설명을 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술관에 있는 동안 저한테 ‘The Searcher’, ‘탐색자’라는 글자가 쓰인 armband가 주어지게 됐는데요. 이게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어떤 비상상황들이 생겼을 때 보이지 않거나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역할이라는 정체성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역할 수행을 할 때, 상상의 존재로서 ‘Searcher’라는 역할을 수행할 때 ‘이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개념에 대해서 나름대로 교정을 해서 그 원칙을 저렇게 벽에 붙이게 되었고, 그리고 사람들을 초대해서 이 원칙에 대해서 각자 나름의 반응을 한 번 달라고 하고, 그리고 초대된 사람들을 순서대로 앞사람이 발음을 한 것에 더 얹어서 발음을 하게 되는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업이 만들어진 기본적인 제작과정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그 안에서 이루어졌고요. 그리고 방금 보신 사진들을 보면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저의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는지를 설명드리기는 어렵겠지만 처음에 보여드렸던 이미지가 2번째 리스폰스였고 그리고 두 번째 보여줬던 이미지는 26번째쯤의 것인데 그때쯤 보면 이미 제가 초기에 제안했던 개념들이 흩어지고 있고, 오히려 사람들이 바로 앞에 다른 사람이 썼던 것을 분석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재밌는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총 66개의 사람들의 반응을 수집을 하게 됐고요. 말하자면 이것이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일종의 텍스트 혹은 일종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모음집이 만들어졌지만 제가 이걸 가지고 그 당시에는 뭘 할지는 사실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을 했고, 이후에도 이런 식의 작업을 여러 번 진행을 했습니다. 사진에 커피머신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 전시 안에서 제가 일종의 마이크로이코노미, 소규모 경제구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반응을 보내주는 사람에게는 제가 커피를 내려주면서 전시 기간 동안 이렇게 해서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이 작업의 시작점이 말하자면 어떤 시간과 그 시간이 개입하게 되는 지점이 이 작업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에, 시간성과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에 대해서 다루는 오늘 발표에 제가 이 작업을 포함시켜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작업은 바로 옆에 있었던 작업인데요. 3개의 턴테이블에 커스텀 메이드로 제작한 레코드를 재생했던 작업입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나누는 상상의 대화를 서로 대화의 순서가 맞아떨어지게 한 작업이었는데요. 한쪽이 벤야민, 반대편이 가타리, 그리고 중간에 있는 것은 배경음이었고, 이 두 사람이 말하는 것은 제가 녹음하고 목소리 피치를 다르게 해서 재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벤야민 같은 경우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인용했고, 그리고 가타리 같은 경우는 좀 다른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이 두 사람의 얘기가 같이 재생을 했을 때 서로 말이 되는 것들을 뽑아서 들려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슬라이드에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구성을 했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턴테이블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세팅을 해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제가 사전에 구성해둔 딱딱 맞아떨어지는 대화들이 서로 시간이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서 싱크 상태에 있는 시간이 참여자의 개입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런 상황들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진행을 해보겠는데요. 지금 보시는 작업은 2012년, 2013년에 LA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레지던시에서 진행을 한 작업입니다. 당시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LA의 대중문화역사 그 표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야구라는 주제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특히 시간적으로는 1965년 LA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인데요. 왜냐하면 첫 번째, 폭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고, 또 LA다저스가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해여서 흥미로운 역학이 있는 시간대였습니다.
이 연구를 하다가 보니 앞선 슬라이드에서 본 「LA Dodger’s Yearbook (1965)」이라는 책을 찾게 됐는데요. 여기에서 다저스 소속 팀원들이 비슷한 이미지로 증명사진을 촬영한 페이지를 찾게 돼서 이 두 개를 골라서 겹쳤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더 이상 개인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인데요.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LA라는 글자가 두 번 겹쳐있고, 그래서 제목도 「LA-LA」, LA의 별명이 ‘La La Land’라는 것도 언급을 하면서 지어봤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누구를 겹칠지 모르는 기준은 비슷한 두 사람을 가지고 있어서 이 사진을 겹쳤을 때 이미지가 너무 왜곡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선수의 피부색도 영향을 미쳤냐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얼굴의 형태적인 측면을 더 반영했고, 어쨌든 이렇게 겹쳐놓음으로써 이 선수가 이 선수라는 식의 정체성을 포함한 것을 없애서 이것이 어떤 개인선수라기보다는 보다 문화적인 현상으로서 접근을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다저스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면 1940년대에는 뉴욕 브루클린에 근거를 두다가 1950년대 초에 LA에 옮기게 됐고,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라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가 뛰기도 했던 곳이 LA다저스라는 배경에서 만들어진 작업이기도 합니다.
지금 보시는 전경 같은 경우에는 베를린에 있는 Deutsche Bank KunstHalle에서 진행을 했을 때의 설치 전경이고요.
크기가 큰 규모의 작업이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작업 같은 경우에는 2015년에 ABC 베를린 아트페어에서 보여줬던 대규모 실크스크린 작업 4점인데요. 크기가 가로 2m, 세로 3m 되는 작업이었고, 실크스크린을 알루미늄 패널 위에 했고 저의 작업실 스튜디오에서 우선 제작을 한 것입니다. 개념적인 부분보다 일단은 기술적으로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제가 1999년에 예술학교에 다닐 때 찍은 사진인데요. 두 개의 사진은 숲에서 찍은 것이고 두 개의 우주 은하 사진은 다른 책에 있는 것을 제가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작품 제목들을 보면 하나의 제목은 「Clearing」이라고 해서 숲 같은 곳에 비어 있는 곳, 그리고 하나는 「Arrival」라고 해서 ‘도착’이라는 뜻의 제목이고, 나머지 두 작업은 제목을 설명 드리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일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Clearing(비어 있는 곳)」 같은 경우에는 독일 동화 같은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할 텐데요. 독일 동화 같은 데를 보면 숲속에 있는 비어 있는 곳들이 항상 마지막 결말이 이뤄지는 곳이거나 아니면 어떤 진실이 마침내 드러나는 곳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개념적인 배경으로 제가 말씀드렸었던 결정주의와 어떤 우연에 기대는 우연주의의 대립을 개념적인 배경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고요.
지금 보시면 작업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사진들입니다.
지금 두 작업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풍경을 찍은 것인데요. 2012년에 LA에서 레지던시를 할 때 LA 북부 그리고 LA 북부에 있는 국립공원에 가서 찍은 것입니다. 그 공원에 가면 실제로 산안드레아스 단층대를 실물로 볼 수 있는데요. 당시의 제 관심사가 ‘어떤 표면 아래에 있는 긴장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였고 이것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압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해지는지가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지층이라는 것부터 살펴봐야겠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고 확장을 해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그래서 앞서 보여드린 사진에서는 실제로 땅이 갈라져서 말려들어간 모습을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총 10개의 작품을 이것의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만들게 된 인화기법은 사실 표준적인 인화기법을 살짝 바꾼 것인데요.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면, 큰 판을 만든 것이 스크린이 존재하지 않는 사이즈이기 때문에 직접 만들어야지 됐던 것이고 지금 보시는 사진들이 이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들인데요. 특히 작업실 안에서 금속 작업을 마친 뒤에 인화를 하는 것이, 잉크를 사용한 인화가 아니라 끈적끈적한 접착제를 가지고 사용을 해서 아크릴판에다 인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금속박을 위에다가 입혀가지고 접착을 시켜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죠.
그래서 지금 보시는 것처럼 금속박을 스펀지로 긁어내면 인화해야 하는 부분은 붙어 있고, 긁어낸 부분은 떨어져서 이미지가 완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과정을 보게 되면 인쇄를 하는 거라기보다는 필터를 적용한 것 같은 과정이고, 인화를 하게 되면 틈이나 주름 같은 것을 보이게 되는데요, 페인팅 뭐 이런 것과는 달리. 또 실크 스크린이라는 것이 사실은 똑같은 인지를 100장을 찍거나 1,000장을 찍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과정이지만, 이런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작업들 사이에 개별성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 과정을 제가 완벽하게 통제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이 작업의 불확실성이라는 성격을 안겨줌으로써 제 작업에 개념적으로도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6년에 진행한 설치작업이고, 좀 이따 영상을 보시면 조금 더 명확해질 텐데요. 제가 100m 정도 되는 길이의 복도에 텍스트 작업을 진행했고, 사실은 조금 모호한 작업이기 때문에 일단 이미지를 보여드리면서 설명하고 영상을 재생해보겠습니다.
가운데쯤에는 이런 모습이었고, 파우더코팅을 한 금속재질로 된 작업이었습니다. 분체(粉體) 제작이라고 하시죠. 마지막 부분이 나오는데요. 시작점이 반대지점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이 작업에 쓰인 텍스트를 방금 보셨는데요. 내용을 다 읽을 필요는 없지만 노란색 텍스트는 솔 크립키(Saul Kripke)라는 철학자의 텍스트에서 가지고 온 것이고, 나머지 부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니체의 텍스트에서 가지고 온 것이고. 니체에 대해서도 말씀드리면 영원회귀라는 사실은 순환의 개념이 있는 아시아철학에서 주로 유래한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을 얘기했었고. 이 작업에서 이런 텍스트들을 출처를 삼음으로써 「차라투스트라」의 텍스트에서 말이 된 것처럼 또 다른 장소도 이렇게 왔다가 돌아온 장소이기도 하고, 또 솔 크립키의 텍스트에서 이야기되었던 역사를 어떻게 반대방향으로 바라볼 것인가라는 부분, 첫 번째로. 그리고 두 번째는 기법적인 면에서 텍스트 그리고 타이포그래피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풀어가고자 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베를린에 있는 한 건물에서 설치를 했던 작업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 작업에 대해서 사실 논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요. 이 작업에서 얘기하는 철학적인 개념을 생각하다가 지쳐버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작업은 어떤 철학적인 개념보다는 글쓰기라는 행위의 통합성. 말하자면 이 작업을 실제로 보게 되면 모든 텍스트들이 다 형태가 왜곡이 되어 있고, 실제로 중간쯤에 갔을 때는 텍스트들이 다 흩어져있는데요.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어떤 의미의 가속화 혹은 어떤 의미 혹은 언어와의 통합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왜냐면 지금 이 작업을 봤을 때 하나도 안정적으로 모양을 띠고 있는 글자들이 없고, 그리고 실제로 이 흩어져있는 형태가 건물의 모양에 맞춰서 밀리미터 단위로 구성이 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 흩어져있는 글자들이 의미의 기능적인 입자 같은 것이고, 지금 보신 영상에서 흩어지는 부분을 봤고, 이 섹션이 끝날 때쯤에 다시 텍스트들이 합쳐지는데요. 물론 맥락에 맞춰서 독일어로 제작이 되었고, 만약에 한국에서 이 작업을 한다면 아마 한글로 이것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작업이 어떻게 제작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인데요. 뒤에 막대기를 붙이고 실제로 벽에 붙일 때는 작업을 움직이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 자석을 통해서 고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작업 같은 경우는 아직 진행 중인 작업이고 베이징에 있는 괴테 인티스티튜트와 같이 시작한 작업이고요. 중국 같은 경우에 공공공간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아직 실제로 구현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제목은 「사물의 흐름에 대한 생각」이라는 제목이고요.
그래서 위치를 아마 베이징을 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위에 있는 곳이 천안문 광장이고 이쪽이 작업을 진행했던 장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진을 보시면 지금 제가 설치를 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 곳에 보면 벤치 정도의 높이로 그리드 형태의 구조가 있고요. 크기가 작지는 않습니다. 가로 50m, 세로 20m 정도 되는 크기인데요. 제가 생각을 했던 것은 이 공간을 파도 모양을 띠고 있는 사각형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이 공간의 역사를 고증을 통해서 살펴보면 예전에 여기가 강이 흘렀던 자리였거든요.
그래서 흐름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기 보시는 파도의 패턴을 만들어냈고 지금 이 사진을 보시면 정확히 이게 어떤 형태로 흐르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간을 물 혹은 가상의 파도가 덮고 있는 것으로 이런 패턴을 만들어내려고 했고,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 사각형을 보시면 실제로 이 작품이 구현이 될 때는 이 공간 전체를 덮고 있는 이 파도를 그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라서 놓는 이 정도 되는 높이로 배치를 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금속으로 제작을 해서 윗부분 같은 경우는 연마를 하고 나머지 부분은 금속재료 그대로 두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작업들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엮여 있는 상태이기를 바랐고, 개념적으로는 「Book of Changes」, 「주역(周易)」 혹은 「역경(易經)」이라고 부르는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가 더 깊이 설명드릴 시간은 없지만 지금 이 책을 보시면 브레히트(Bertolt Brecht) 같은 경우에도 이러한 책을 썼는데요. ‘어떤 사회를 갖고 싶지만 그 사회 흐름에 가만히 그 흐름만 보면서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중국 문화라든지 역사 철학에 상당히 많이 영향을 받았는데요. 이 책의 제목을 따왔는데 이것의 활자를 좀 비틀어서 영어로 제 작업의 제목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특히나 중국에서 제가 이 작업을 진행하는데 중국에서 마치 브레히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가 이 작업을 통해서 어떤 사회적인 변화를 끌어냈다, 이런 것을 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보시는 사진은 각종 종이와 텍스트 등으로 뒤덮여있는 저의 창동 스튜디오의 모습이고요. 제가 어떤 식으로 리서치를 전개를 하고 아이디어를 뽑아내는지 보여드리고 싶은데, 주로 인지적인 것들을 다 붙여서 붙여놓고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전기가 팍 하면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료를 짧게나마 소개를 하고 싶은데요. 주로 제레미 글릭(Jeremy Glick)이라든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캐서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 같은 사람들의 자료들을 참고적으로 삼고 있고, 특히 제레미 글릭 같은 경우에 아이티에서 일어났던 혁명과 식민주의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이것을 과거에 있었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이라든지 에두아르 글리상(Edouard Glissant)이라든지 말콤 엑스(Malcolm X)와 연관시켜서 어떻게 이것을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볼지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요는 말하자면 ‘어떻게 과거를 잊지 않는다.’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요. 또 다른 고려하고 있던 점 중의 하나는 특히 캐서린 말라부나 주디스 버틀러, 그리고 이것을 몸과 마음이라는 주제, 그리고 뇌 과학이라는 것까지 생각을 했을 때 지금 AI라든지 이런 기술 관점 하에서 어떻게 우리가 미래를 바라보게 될 것인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의 몸이라든지 두뇌가 확장이 될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과거를 대체 잊지 않고서 미래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지금 말씀드린 자료들을 통해서 생각을 해보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국에 와서 보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아마 딱 보시고 다 아셨겠지만 바둑에 대한 부분이고요. 아직 작업의 제목은 가제인 상태이지만 앞서 보여드렸던 슬라이드에 있던 것이 2016년도 초에 딥마인드라는 이 회사가 네이처라는 잡지에 처음으로 바둑에 대해서 게재한 논문이고요. 이 부분 텍스트 인용해온 부분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 바둑판이라는 것 안에서 사실상 거의 무한한, 가능한 경우의 수가 나오는지에 대한 부분이고, 지금 보시는 결과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서 사실 10분 정도 거리 떨어져있는 포시즌스호텔에서 벌어졌던 바둑 대결에 딥마인드 직원, 그리고 유럽 바둑 챔피언이 이렇게 같이 있는 모습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세돌 같은 경우에 5전 4패를 했는데요. 이 게임이 진행 중일 때 봤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오면 무조건 이걸로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거의 형식주의적인 바둑이라는 게임을 가지고 정확히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역사적인 부분, 문화적인 부분과 연결시킬지 그 입구도 아직 찾지 못했고요. 왜냐면 바둑이라는 것이 체스처럼 역시나 추상적인 게임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보통 제가 작업 진행할 때와는 다르게 어떤 매체를 사용할지도 아직 전혀 모르겠는 상태이고, 지금 현재로서는 작업이 차후에 진행이 된다면 어떤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하면 좋겠다 정도의 연결점 정도를 찾아낸 상태입니다. 어쩌다 바둑판이라는 것을 소재로 활용해서 informative한 작업이 만들어지면서 완성이 되는 과정 중심적인 작업을 만들 수 있고, 그리고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오래된 아시아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생각들이 더 복잡해지기도 하고 풍부해지기도 합니다. 지금 보시는 이미지 같은 경우에는 바둑판이 만약에 이런 형태로 돼 있다면 어떨까 이런 건데, 작업이 이런 식으로 될 거라기보다는 제가 뭔가를 생각하는 한 가운데 있을 때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여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보여드리는 것이고, 이 얘기를 하면서 발표를 마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대 담
○ 사회 | 박희정
예. 발표 감사드리고요. 바로 이화여자대학교 김남시 교수님 단상 위로 오셔서 대담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자리만 정돈할게요.
○ 패널 | 김남시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안녕하십니까. 대담이라기보다는 제가 이제 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 지금 프레젠테이션을 들으셨을 텐데 쉽지 않죠. 그래서 쉽지 않은 작업들을 우리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려고 합니다.
사실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제일 먼저 드리고 싶었던 질문은 어떻게 보면 좀 부차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아까 보셨던 작업 중에 굉장히 큰 「Lichtung」라고 실크스크린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 작업들을 하는 굉장히 큰 스튜디오가 있던데, 필요로 하는 큰 작업을 위해서. 그 스튜디오가 자기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일시적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프로젝트마다 공간을 필요로 하는 곳들을 빌립니다. 여러 작업들이 있는 곳들 같은 경우도 일시적으로만 빌렸던 곳이고, 사진 인화하는 곳 같은 경우는 쭉 유지를 하고 있는 곳이지만 실제 크기는 앞서 보셨던 이미지의 장소들보다 더 작기 때문에 말씀드리자면 프로젝트에 따라서 작업공간을 달리하는 식으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 패널 | 김남시 교수(이화여자대학교)
기본적으로 개념적인 에세이 작업을 하신다고 아까 말씀을 하셨고요. 그 작업들 내용을 보시면서 들으셨을 겁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소개해주신 「The Searcher」라는 작업에서 여러분들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armband가 있었죠, ‘The Searcher’라고 하는 이름이 붙은. 네. 이 작업인데요. 아까 프레젠테이션 하면서도 조금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메시아주의와 관련된 작업이다.” 이런 얘기도 했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여기 나와 있는 이 질문들과 텍스트, 그리고 여러분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이 옆에 2명의 인물사진이 있는데 1명은 발터 벤야민이고요, 밑에는 펠릭스 가타리 2명의 인물인데, 이런 인물들과도 조금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첫 번째 드리고 싶은 질문은 여기에서 ‘The Searcher’라고 하는 존재와 본인이 생각하는 메시아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그 얘기를 해주시면 좋겠다.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질문 주신 내용에 답을 해보려고 시도해보겠는데요. 메시아주의라는 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기독교, 유대주의, 유대교 같은 것들이고, 벤야민 같은 경우에 유대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메시아주의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메시아라는 구원자라는 존재, 혹은 그런 상상의 존재, 혹은 메시아라는 개념, 구원, 용서 이런 개념들이 흥미로운 점은 실은 이런 개념들이 시도하는 것이 바로 제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탈출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성을 뒤집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라는 존재가 탈출구가 없는 시간에서 탈출구가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만 어떤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패널 | 김남시 교수(이화여자대학교)
네.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아마 여러분들이 아까 보셨을 테지만 여러 작업들에서, 그러니까 맨 처음에 프레젠테이션 할 때 말씀하셨던 우주론, 우주의 그림 가지고 되돌릴 수 있는 것과 되돌릴 수 없는 것 그 두 가지 부분을 얘기하셨어요. Irreversible하고 개인의 responsibility에 대해서. 그중에서 작가님은 기본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다시 되돌리려고 하는 시도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메시아주의와도 통하는 맥락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런 시도들을 이끌 수 있는 작업속에서의 여러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아까 「The Searcher」에서도 두 대화. 벤야민과 가타리가 대화하는 이 내용들을 레코드판으로 진행을 시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었던 애초의 질문은 그다음 사람이 이어서 계속 거기에 대해서 코멘트를 달게 하는 그런 방식이, 그러니까 계속 예를 들면 맨 처음 사람이 “The Searcher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썼을 때 그것을 두 번째 사람이 또다시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쓰게 되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대답의 확정성이 다시 흐트러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뭔가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지 되돌리려고 하는 그러한 아이디어를 작업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답변해주시겠습니까?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김남시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이 제 작업에서 흥미로운 관찰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비가역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2011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그때가 블록체인이 등장한 해이기도 합니다. 블록체인이라는 것이 사실은 한 번 기록된 것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확정성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한 개념이었거든요. 그래서 되돌릴 수 있는 것,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의견을 계속 말씀드리자면 사실은 그것이 상당히 정치적인 생각일 수도 있고, 그리고 캐서린 말라부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가소성이라는 개념하고 연관이 될 수 있는데요. 이를테면 우리가 우리의 외부에서 만들어진 형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지고 가는 주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물론 커뮤니티 기반의 작업들을 하지만, 시민운동가는 아니지만 더 큰 바꿀 수 없는 체제 내부에서도 어떤 방식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측면에서 그것은 매우 정치적인 부분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패널 | 김남시 교수(이화여자대학교)
네. 그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건데요. 사실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메시아나 신적인 존재가 아닌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었던 것, 한 번 행해진 것을 다시 되돌리려고 하는 시도들이 결국은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예를 들면 한 번 내뱉었던 말을 얘기했는데 “이거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거나, 아까 봤었던 것처럼 글씨를 써놓고 “이거 아니야.”라고 글씨를 무효화시키거나. 어쨌든 우리에게 있어서 이루어졌었던 것을 다시 reversible하게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는 결국은 반복을 통해서, 이전에 행해졌었던 것을 무효화시키고 “이거 아니야.” 부정하고 하는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제스처들이 작업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아까 레코드판도 그렇고 대답을 하는 여기에서도 그렇고요. 두 대화를 아까 보셨지만 「Dance the Walter-Félix」에서는 두 명의 텍스트들이 계속 겹쳤죠. 앞에서 했었던 사람의 말을 그다음 사람의 말이 무효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또다시 무효화하게 되는. 그러니까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고 하는 세속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어떤 것인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런 시도가 보시는 것처럼 결과적으로는 무의미를 연상한다는 거죠. 누군가가 했었던 말을 무효화시키고, 혹은 누군가가 했었던 말을 다른 사람의 말로 덮쳐서 겹친. Supersequence라고 그렇죠. 이런 일이 일어났었을 때는 우리한테는 무의미하게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텍스트가 되거나 읽히지 않는 말이 되거나 하는데, 그런 모순에 대해서 작업을 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몇 가지 말씀을 주신 것 같은데, 마지막에 주신 부분이 제일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제 작업에 역설이라는 것을 활용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남시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의미를 가지려고 하는 시도가 무의미로 끝나는 역설에 처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사람들이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예를 들어서 「The Searcher」 같은 프로젝트 같은 경우에 “결과물로서 어떤 텍스트가 나오게 되는데 그게 끝이냐?” “그것 가지고 앞으로 어떤 것을 더 할 것이냐?” 이런 질문들을 하는데, 저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는데 ‘만약에 그러면 이 작업을 조각이나 회화로 풀어냈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물어봤을 때 결과적으로는 조각이나 회화라는 어떤 형식, 형태라는 것이 남게 되고 그것을 작업의 결과물로 받아들일 텐데 그러면 이렇게 나란히 텍스트라는 것을 똑같은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비록 물리적인 어떤 현황이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이 결과물이 기표와 숫자가 복잡하게 뒤섞이면 덩어리가 아니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사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뭘 하든지 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애초의 의도였고, 그것의 내용이 어떻게 쓰일지보다는 그 방법론에 집중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관계가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입자가속기처럼 많은 요소들을 넣어서 가속을 시켰을 때 무엇인가가 튀어 나오게 되면 그것을 그제야 분석을 해서 이게 과연 사용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이렇게 보는 것과도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나온 것들 중의 다수가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도 받아들이는, 작업과정을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작업의 경우에는 그러한 결과조차도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질의응답
○ 패널 | 김남시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이제 플로우에 질문들을 받아봤으면 좋겠는데요.
○ 질의자1
첫 번째는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다니엘 뷔랑 밑에서 공부했다 그랬는데 다니엘 뷔랑이 프랑스 사람인가요, 독일 사람인가요?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프랑스 사람 다니엘 뷔랑이라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지금 창동에서 연구 중인 장기, 바둑에 대한 비전이 기대가 되는데요. 관계해서 혹시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는지. 지금 생각난다면 어떤 기억으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예술가적 마인드에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고.
세 번째는 반복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종교가 있는지, 종교가 없다면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세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제 작업에서 다니엘 뷔랑 작업의 어떤 미학적인 부분이 겹쳐서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뷔랑에게 영향을 받은 두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첫 번째는 특정한 장소의 맥락을 작업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술이 문화, 역사, 정치적인 부분에서 어떤 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수행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과거에 루이스 캐럴의 소설과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었는데요. 질문 주신 내용에서 어떤 방향에서 루이스 캐럴 작업을 언급하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질의자1
이것이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 책인데요. 보다 보니까 체스 판이 나오고 체스 핀이 나오고 프랑스 유학 중인 앨리스의 가정교사로, 가정교사라고 하시는데 한국어로. 여기서 앨리스하고 장기를 두기도 했고 대리석으로 된 체스 판이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여러 가지가 연상되고 기억되면서 오늘 바둑판을 보면서 그냥 의미가 있는 듯 없는 듯 질문을 한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기억난다면, 가끔 기억을 한다면 그것이 기억에 가끔 떠오르는지. 오늘의 비전이 장기판하고의 관계에서 비전 있는 작업을 할 때 관계가 지어질 것인지 안 지어질 것인지, 유의미한 듯 무의미한 듯,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한국어로 설명 주시는 동안 지금 말씀해주신 부분을 여쭤보시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작업에 있어서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루이스 캐럴 작품은 아직 살펴보지를 못해서 잘 언급해주신 덕분에 한 번 더 살펴보면 좋을 것 같고요.
어릴 때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지금은 종교가 있다기보다 불가지론에 가까운 상태이고요. 종교에 대해서 접근을 할 때 물질주의적인 문화에서의 종교에 관해서 흥미롭게 바라보는 편이라고 그 정도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사회 | 박희정
저희 약속된 시간이 다 되긴 했는데 질문해주셔서요.
○ 질의자2
사실은 오늘 이 발표 자리에 오기 전에 얘기를 했었던 부분인데요. 예를 들면 한국어라든지 아니면 힌디어 같은 다른 언어로, 텍스트라는 것이 형식이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텍스트를 누군가 쓴다면 아랍어나 한국어 같은 것으로, 혹은 이미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텍스트가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실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 마이클 저스트(Michael Just)
「The Searcher」라는 작업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제한을 두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드로잉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불가했는데요. 왜냐면 제가 디지털적으로 그것을 처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질문자께서 말씀 주신 대로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누군가 쓰는 일은 사실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두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질문 주신 내용은 사실 그 특정한 작업에서뿐만 아니라 더 넓은 맥락에서 다른 작업에서 그런 것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주셨는데, 지금 프레젠테이션 중에 독일어로 된 독일에서 했던 작업을 만약에 한국에서 했으면 한글로 할 거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그랬을 때 제가 그 한글이라는 언어를 말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나와 언어의 관계도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게 같은 작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그 언어의 대부분을 제가 말도 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접근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지적해주신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운 맥락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어떤 언어의 외부자로서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당연히 어떤 가능성이 열리는 만큼 어떤 부분은 닫히는 부분도 있을 텐데요. 지금 상태에서 제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부분은 딱 여기 정도까지인 것 같습니다.
○ 사회 | 박희정
준비된 발표가 있어서 여기서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발표해주신 마이클 저스트 씨와 김남시 교수님, 그리고 통역에 박재용 씨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장내 박수)
조금 쉬는 시간 갖고 4시에 바로 다음 카로 악포키에르(Karo Akpokiere) 작가의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